페미니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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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역사

페미니즘 기원

  •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은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라는 저서에서 신체적 차이만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절때 있을 수 없는 획기적인 발언 임으로, 당연히 고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여기서 한가지 볼 수 있는 것은 개념에 기원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최초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 사람은 위베르틴 오클레르(1848~1914)이다. 그녀는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 여러 사료를 종합적으로 보면 결국 19세기 후반에 페미니즘 개념이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 이시기 대표적 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또 한 사람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이다. 그녀는 계몽 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루소(루소는 대표적인 계몽시대 남성우월론자이다.)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작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이나 무산계급을 배제하고 남성에 대해서만 인권을 천명했다. 이에 반발한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에게도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니콜라 드 콩도르세(1743~1794)는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1790)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자유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1기 페미니즘

  • "1세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원래 미국 68운동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2세대로 규정지으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부르던 말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개되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발견된 페미니스트도 포함시킨다. 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이 말했지만, 동시대에 유럽에서 진행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21]나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포함시킨다. 이들은 법적 수단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 했으며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였다.
  •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페미니즘 사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강화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부부는 뒤이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은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진정한 성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페미니즘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정치적 평등), 공산주의(경제적 평등) 등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모든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자유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페미니즘 초창기 주류 사상으로서 여성운동(여권운동)을 원동력으로서 기능하였다. "기존의 체제 상으론 여성이 남성과 완벽한 평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래디컬(극단주의)과 대비되는 온건 페미니즘의 하나이다.
    • 대표적 사상가로 페미니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베티 프리댄 등이 있으며 이에 기초를 공헌한 철학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이 있다. 한국에는 나혜석이 있다.[6] 대표적인 리버럴 페미니즘 운동으로는 19세기에 일어난 여성참정권 획득 운동이 있으며, 20세기 성공한 사회운동으로 평가하는 게 학계의 주 견해다.
  •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는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 등 법률적 권리의 획득과 관련된 투쟁이 이어졌다. 특히 189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핵심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멀린 팽크허스트였다. 그는 1903년 여성 참정권 도입을 목표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를 창립했다. 《서프러제트》는 이를 다룬 영화이다. # 이 움직임들은 당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였고, 1920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1948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제2기 페미니즘

  • 1960년대~1970년대에 걸친 운동으로, 소위 래디컬하다 일컫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이 그 중심이 된다. 단순히 일할 권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평등. 그리고 남성 유명 대학에 입학할 권리, 임신중절 합법화와 시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운동이다. 차별적 관행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주가 된다. 근세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우월주의도 2세대 페미니즘에서 갈라져 나왔다.
  • 1세대 페미니즘의 성취로 여성참정권 보장 등 법적 기본권이 확대되었고, 세탁기, 분유, 피임약의 발명은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가사노동이나 출산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68혁명 이후의 세대들은 여기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1963년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베티 프리댄(1921~2006)은 <여성성의 신화>를 출간해 페미니즘의 제2파를 촉발시켰다. 여기서 프리댄은 많은 여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 과도하게 찬양받는 사회를 비판했다. <여성성의 신화>는 큰 반향을 이끌어 1963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한 임금평등법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댄은 '현대 여성 운동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 1967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이 뉴욕급진여성모임 NYRW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표방했다. 이들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항의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하는 마네킹을 땅에 묻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 여기서 '급진'이란 과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 억압의 근원을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 급진주의 경향은 68세대 젊은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캐서린 맥키넌(1946~ )과 안드레아 드워킨(1946~2005)은 급진주의를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가부장제나 강간 문화와 결부짓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노, 성매매, 그리고 BDSM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80년대 안티-포르노그래피 운동을 주도했다.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1981)에서 드워킨은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결혼이란 강간을 정당화하는 제도" 등의 언급을 했으며, 문예 비평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강간과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기독교 우파와 결탁하여 음란물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들은 미네폴리스주와 버지니아주에서 반 포르노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한다.
  •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급진 리버테리안 페미니스트들이 FACT(Feminist Anti-Censorship Taskforce, 페미니스트 반 검열 대응본부)를 표현의 자유 운동가들가 함께 세워 연방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하였고, 이에 대법원이 받아들여 미국에서 반 포르노법은 폐지된다.
  • 이렇게 여성주의 성 전쟁을 거치면서 2세대 페미니즘은 내부 갈등을 빚으며 퇴조하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활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그 원인을 남성 지배의 문제로 보았던 급진주의를 절충한 사조였다. 또한 페미니즘 외부에서도 페미나치,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대중이 페미니즘에 질려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역시 하향세를 걸었다.

제3기 페미니즘

  • 9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학과 퀴어이론의 영향으로 2세대와는 선을 긋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했다. 이들은 2세대에 비하면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약했지만, 대신에 일상의 페미니즘을 주장했다. 정신분석학, 포스트 모더니즘, 생태주의 등 다양한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페미니즘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냈다. 그리고는 어떤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페미니즘을 맞췄다.
  • 제2파에 이어 보다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여성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나 서구권, 백인, 중산층 여성 등의 권리뿐만 아니라 제3세계, 제 3, n개의 성 등의 "상호교차성" 담론에 도달하였다. 즉 제2파에서 전제되어왔던 소위 '여성문제'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로 규정되는지 의문이 일었고, 학계의 논의가 진전됨에 따라 여성과 여성문제를 일반화된 범주로 인식하는 것은 오류라는 합의에 이른 것이다. 예컨대 같은 여성이라도 무급가사노동에 종사하는 30대 히스패닉 여성과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50대 백인 여성의 삶의 양식은 크게 다르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모두 '여성문제'라는 프레임에 끼우는 것이 아니라 n개의 성, 내지는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등의 개념을 통해 좀더 넓은 범위에서 성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현대 페미니즘 학계의 주된 경향이다.
  • n개의 성에는 생물학적 남성과 그 속의 수많은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포함된다. 요컨데 현대 페미니즘은 여성만이 아닌 다른 소수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트랜스 페미니즘, 아나코 페미니즘, 우머니즘과 같은 다른 소수자와의 연대, 여성내에서의 차별을 주장하거나 아나키즘 등 사상을 결합한 페미니즘이 3세대 페미니즘에 들어간다. 립스틱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3세대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근래 한국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급진성과 과격성에 지친 일부 이들이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대 선진국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대안, 신좌파와 페미니즘의 결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인권을 키워드로 삼은 이들이 주가 되고 있다. 물론 래디컬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TIRF도 적지 않지만, 전자가 훨씬 높다.

제4기 페미니즘

  • 4세대 페미니즘, 혹은 4물결 페미니즘(4th wave feminism)은 2010년대부터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새로이 생겨난 개념으로, 2011년에 제니퍼 바움가드너가 맨 처음 제시하였으며, 키라 코흐랜이 2013년에 본격적으로 개념화했다 단 용어의 정의와 범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활동하는 것이 특징이며, 어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지는 이용자마다 차이가 있다. 3세대에 비해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대한민국에서는 구 시대적인 산물

  • 페미니즘에서 기원과 제1기의 경우는 여성이 인권으로써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의논이나 운동의 여파는 1890년대에서 1945년 말기 까지, 외국문물과 선교사들이 우리나가 공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지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 당연히 우리나라는 미국 보다는 시기적으로 느릴 수 밖에 없다. 일제침략 시기는 여성운동이 활동하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이 못되었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잿더미였다. 그리고 여성의 공교육은 거의 1960년대에 시작이 되었다. 그 당시 수준으로도 초등학교 중학교 까지가 겨우 공교육 이었으며 고등학교는 정말로 엘리트 층만 향유하는 시대였다. 대학 대학원은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도 가지 못하는 꿈에 시대였다.
  • 1970년에 들어와야 대학 대학원에 문을 두드리는 수준이 되었고, 공교육에 제대로 지원받은 아이들이 당연히 대학에 들어오는 상황은 1970년대 초이며, 대학원은 1970년대 중반이다. 더군다나 자유롭게 해외여행이 가능한 시기는 70년대 말이며 그때 그들이 접한 페미니즘은 미국과 유럽에서 손절하기 시작한 급진페미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급진 페미니즘을 한국에 가져온 것이다.
  • 더군다나 70년대 말까지 박정희 시대 그리고 전두환도 군부시대인데 운동권에서 페미? 꿈도 꾸지 말아라 전혀 말이 안되었다. 심지어 운동권도 전투경찰과 물리력으로 싸우려면 극 남성주의로 주도되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정상적일 수도 없었다.
  • 결국 자유화가 불어닥친 1980년대 말 부터 페미니즘이 시작되었다고 말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운동권 이라는 프레임에 최적화 될 수 있었다. 사회적 합의내에서 당시는 여성의 인권이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 당시의 페미니즘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말을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미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운동이란 프레임 내에서 동력을 잃는 것은 뻔했다.
  • 그리고 페미니즘이 운동에 목적성을 잃게 된 것은 바로 선거권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1948년에서 투표권이 남성 중심이 아니라 성별 차이가 없었다.
    • 한국은 독립 직후 사회, 경제, 문화가 거의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여성 참정권 보장에 대한 유의미한 반발이 없어 꽤 빨리 이루어진 편이다.
    • 미국은 1920년 흑인에 대한 투표권은 1965년이다.
    • 프랑스는 1944년에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 끝나고 1945년부터 정식으로 지방투표를 시작했다.
    • 영국은 1918년 2월 종전후 여성투표권이 시작되었다.
    • 일본은 제국시대에는 여성 참정권/선거권이 없었다. 1946년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의해 여성 참정권이 이루어졌다.
  • 선거권이 중요한 이유는 그 투표 하나로 여성 자체가 정치력을 좌지우지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이 필요 없는 이유(여성 총학생회 중심으로)

  • 1980년대 말 운동권 세력에 맞추어서 여성 총학생회가 탄생하였고, 여러 대학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 여총의 역할은 페미니즘 사상 전파 그리고 여성인권 운동이다.
  • 그러나 여총은 대부분의 주요 메이져 대학에서 시간순으로 죄다 폐지 수순을 격게 된다. 여기에 원인은 다음과 같다.
    • 대학교 내에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대부분이 여성차별 문제를 개선하고 있었다.
    • 총여학생 자체가 여학생 위주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모든 성별의 학생에게 돈을 겆고 있었다. 즉 남성 학생들은 역차별을 받았다.
    • 사회적 여론에 의해 여성 총학의 입지가 지나치게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 학생들이 여총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없어졌다. 그로 인해 여총은 항상 소수이며 공석인 경우가 많았다.
  • 그결과 폐지된 대학들은 다음 아래와 같다.
    • 서울대학교 1993년
    • 고려대학교 1989년 자진 해체
    • 인하대학교 2008년
    • 국민대학교 2010년
    • 부산대학교 2012년
    • 단국대 천안 캠퍼스 2010년 그런데 단국대는 아예 여총이 없다.
    • 공주대학교 2015년
    •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2015년
    • 경상국립대학교 2016년
    • 동국대학교 2018년
    • 연세대학교 2019년
    • 충북대학교 2019년
    •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