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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기 페미니즘 === | === 제2기 페미니즘 === | ||
* '''1960년대~1970년대에 걸친 운동으로, 소위 래디컬하다 일컫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이 그 중심이 된다. 단순히 일할 권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평등. 그리고 남성 유명 대학에 입학할 권리, 임신중절 합법화와 시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운동이다.''' 차별적 관행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주가 된다. '''근세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우월주의도 2세대 페미니즘에서 갈라져 나왔다.''' | |||
* 1세대 페미니즘의 성취로 여성참정권 보장 등 법적 기본권이 확대되었고, 세탁기, 분유, 피임약의 발명은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가사노동이나 출산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68혁명 이후의 세대들은 여기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
* 1963년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베티 프리댄(1921~2006)'''은 <여성성의 신화>를 출간해 페미니즘의 제2파를 촉발시켰다. 여기서 프리댄은 많은 여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 과도하게 찬양받는 사회를 비판했다. <여성성의 신화>는 큰 반향을 이끌어 1963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한 임금평등법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댄은 '현대 여성 운동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 |||
* '''1967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이 뉴욕급진여성모임 NYRW'''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표방했다. 이들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항의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하는 마네킹을 땅에 묻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 |||
* '''여기서 '급진'이란 과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 억압의 근원을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 |||
* '''급진주의 경향은 68세대 젊은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캐서린 맥키넌(1946~ )과 안드레아 드워킨(1946~2005)은 급진주의를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가부장제나 강간 문화와 결부짓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노, 성매매, 그리고 BDSM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80년대 안티-포르노그래피 운동을 주도했다.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1981)에서 드워킨은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결혼이란 강간을 정당화하는 제도" 등의 언급을 했으며, 문예 비평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강간과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기독교 우파와 결탁하여 음란물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들은 미네폴리스주와 버지니아주에서 반 포르노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한다.''' | |||
*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급진 리버테리안 페미니스트들이 FACT(Feminist Anti-Censorship Taskforce, 페미니스트 반 검열 대응본부)를 표현의 자유 운동가들가 함께 세워 연방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하였고, 이에 대법원이 받아들여 미국에서 반 포르노법은 폐지된다.''' | |||
* '''이렇게 여성주의 성 전쟁을 거치면서 2세대 페미니즘은 내부 갈등을 빚으며 퇴조하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활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그 원인을 남성 지배의 문제로 보았던 급진주의를 절충한 사조였다. 또한 페미니즘 외부에서도 페미나치,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대중이 페미니즘에 질려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역시 하향세를 걸었다.''' | |||
=== 제3기 페미니즘 === | === 제3기 페미니즘 === |
2022년 6월 7일 (화) 12:53 판
페미니즘 역사
- 자료 구조는 나무위키 페미니즘 에서 참조한다.
페미니즘 기원
-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은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라는 저서에서 신체적 차이만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절때 있을 수 없는 획기적인 발언 임으로, 당연히 고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여기서 한가지 볼 수 있는 것은 개념에 기원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최초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 사람은 위베르틴 오클레르(1848~1914)이다. 그녀는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 여러 사료를 종합적으로 보면 결국 19세기 후반에 페미니즘 개념이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 이시기 대표적 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또 한 사람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이다. 그녀는 계몽 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루소(루소는 대표적인 계몽시대 남성우월론자이다.)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작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이나 무산계급을 배제하고 남성에 대해서만 인권을 천명했다. 이에 반발한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에게도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니콜라 드 콩도르세(1743~1794)는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1790)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자유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1기 페미니즘
- "1세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원래 미국 68운동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2세대로 규정지으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부르던 말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개되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발견된 페미니스트도 포함시킨다. 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이 말했지만, 동시대에 유럽에서 진행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21]나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포함시킨다. 이들은 법적 수단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 했으며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였다.
-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페미니즘 사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강화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부부는 뒤이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은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진정한 성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페미니즘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정치적 평등), 공산주의(경제적 평등) 등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모든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자유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페미니즘 초창기 주류 사상으로서 여성운동(여권운동)을 원동력으로서 기능하였다. "기존의 체제 상으론 여성이 남성과 완벽한 평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래디컬(극단주의)과 대비되는 온건 페미니즘의 하나이다.
- 대표적 사상가로 페미니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베티 프리댄 등이 있으며 이에 기초를 공헌한 철학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이 있다. 한국에는 나혜석이 있다.[6] 대표적인 리버럴 페미니즘 운동으로는 19세기에 일어난 여성참정권 획득 운동이 있으며, 20세기 성공한 사회운동으로 평가하는 게 학계의 주 견해다.
-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는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 등 법률적 권리의 획득과 관련된 투쟁이 이어졌다. 특히 189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핵심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멀린 팽크허스트였다. 그는 1903년 여성 참정권 도입을 목표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를 창립했다. 《서프러제트》는 이를 다룬 영화이다. # 이 움직임들은 당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였고, 1920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1948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제2기 페미니즘
- 1960년대~1970년대에 걸친 운동으로, 소위 래디컬하다 일컫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이 그 중심이 된다. 단순히 일할 권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평등. 그리고 남성 유명 대학에 입학할 권리, 임신중절 합법화와 시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운동이다. 차별적 관행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주가 된다. 근세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우월주의도 2세대 페미니즘에서 갈라져 나왔다.
- 1세대 페미니즘의 성취로 여성참정권 보장 등 법적 기본권이 확대되었고, 세탁기, 분유, 피임약의 발명은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가사노동이나 출산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68혁명 이후의 세대들은 여기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1963년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베티 프리댄(1921~2006)은 <여성성의 신화>를 출간해 페미니즘의 제2파를 촉발시켰다. 여기서 프리댄은 많은 여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 과도하게 찬양받는 사회를 비판했다. <여성성의 신화>는 큰 반향을 이끌어 1963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한 임금평등법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댄은 '현대 여성 운동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 1967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이 뉴욕급진여성모임 NYRW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표방했다. 이들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항의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하는 마네킹을 땅에 묻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 여기서 '급진'이란 과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 억압의 근원을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 급진주의 경향은 68세대 젊은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캐서린 맥키넌(1946~ )과 안드레아 드워킨(1946~2005)은 급진주의를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가부장제나 강간 문화와 결부짓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노, 성매매, 그리고 BDSM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80년대 안티-포르노그래피 운동을 주도했다.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1981)에서 드워킨은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결혼이란 강간을 정당화하는 제도" 등의 언급을 했으며, 문예 비평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강간과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기독교 우파와 결탁하여 음란물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들은 미네폴리스주와 버지니아주에서 반 포르노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한다.
-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급진 리버테리안 페미니스트들이 FACT(Feminist Anti-Censorship Taskforce, 페미니스트 반 검열 대응본부)를 표현의 자유 운동가들가 함께 세워 연방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하였고, 이에 대법원이 받아들여 미국에서 반 포르노법은 폐지된다.
- 이렇게 여성주의 성 전쟁을 거치면서 2세대 페미니즘은 내부 갈등을 빚으며 퇴조하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활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그 원인을 남성 지배의 문제로 보았던 급진주의를 절충한 사조였다. 또한 페미니즘 외부에서도 페미나치,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대중이 페미니즘에 질려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역시 하향세를 걸었다.